제주에 와서 가장 많이 한 일을 떠올려보면 마당에서 숯불에 고기 구워 먹기다.

예전엔 캠핑 가서나 가끔 먹던걸 여기서는 그냥 아무 때나 해먹을 수 있다. 보통 전원 주택 등으로 간 분들이 처음에나 그렇게 해 먹다가 1년만 지나도 질린다는데.. 우리 집은 2년째 줄기차게 먹고 있다..-_-;


그냥 막 .. 아무때나 구워먹는다



그런데 여기서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꽤 오랜 기간 고기를 구워먹었는데, 매번 결과물이 다르게 나왔다. 어떨땐 기가 막히는 고기가 나오고, 또 어떨땐 숯덩어리가 나오고, 종종 겉은 숯덩이고 속에는 피가 철철 나오는 고기가 되기도 한다.


즉, 일정한 퀄리티의 고기 수율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 상태로 고기 굽기 경험을 막연히 늘린들 전문성이 키워지지 않는다.

고기집 할 것도 아니고 이거 잘 해서 뭐하려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거의 매주 숯불에 고기를 구워먹는데 매번 다른 퀄리티의 결과물이 나오면 그걸 먹어야 하는 가족들의 불만 지수도 올라가고, 나 스스로도 이걸 하기 싫은 일로 분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본시 요리란 자신이 하면서도 즐겁고, 그 결과물이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이상적인 노동 행위 중 하나가 아니던가.


우선 내 문제점을 분석하기 위해 기존 방식을 파악해야 했다.


기존 프로세스

1. 큰 덩어리 고기를 불에 올려 놓는다.

2. 어느정도 익으면 각 고기를 뒤집는다.

3. 반대쪽도 어느정도 익었다고 생각되면 잘게 잘라서 골고루 익게 주기적으로 뒤집어 준다.

4. 대략 노릇노릇해졌다고 판단되면 접시에 담아서 납품한다.

5. 납품한 빈 자리에 새로운 고기를 올려놓는다. 이후 1~5 반복.

딱히 특별한 부분이 없다. 다들 이렇게 하지 않나? ... 개선 포인트가 보이지 않는다.

세부적인 스킬과 타이밍의 차이인가... 결국 그냥 감으로 해야 하나...


그나마 내가 고기를 구워서 가족들이 맛있다! 라고 말했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그때는 뭐가 달랐나..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 항상 캠핑가서 고기를 구우면... 처음 구운 고기는 죄다 겉이 타버려서 투덜대며 먹고,

나중에 남은 짜투리 고기들 구운거...그게 다들 정말 맛있다고 했었다. 숯 향이 잘 배어있네 어쩌네 하면서..


..... 기존 프로세스를 파악할 때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 '불'... 불이 가장 핵심 요인일 가능성이 있었다.

고기 굽기라는 행위의 본질은 결국 적당한 열을 가해 고기 속의 단백질 변형을 일으키고, 육즙을 고기 속에 잘 보관해서 맛을 만들어내는 행위다.

이때 이 '적당한 열' 이라는 부분을 난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숯에 불을 붙여서 불꽃이 한번 생겼다가 살짝 사그라질때 즈음의 불로 굽기로 결정했다. 조리 시간은 좀 더 길어지겠지만..


그렇게 해서 고기를 구워서 납품했다. 가족들의 반응은 괜찮은 편이었다. 고기 굽느라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그 기다리는 시간 때문에 좀 더 고기가 맛있게 느껴지는 부가적인 효과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고기 굽기 전문가 되기 완성. .. 해답은 불이었어요~


하고 끝나면 좋겠지만 여전히 내 눈에는 문제점이 보였다.


고기의 익은 정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최상의 고기만을 제공하고 싶은데, 굽혀진 정도가 어떤 놈은 바삭바삭하고, 어떤놈은 좀 말랑말랑한.. 미묘한 차이가 보였다. 그리고 고기 구울때 왠지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다. 처음엔 그냥 멍하니 고기만 보다가 어느 순간 부터는 고기 뒤집느라 바쁘다. 이거 뒤집고 있으면 저게 타고 있고..저걸 후다닥 뒤집으면 또 다른게 탈려고 하는 식이다.


왜 정신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FPS 이라는 개념을 내 마음대로 생각해냈다.


...... Flip per Second...;;


결국 내 손의 문제인건데... 시간당 뒤집을 수 있는 고기의 갯수가 정해져 있다. 즉, 한번에 관리 가능한 고기 덩어리 갯수가 정해져 있다는 소리다.

예를들어 초당 1개의 고기를 뒤집을 수 있는데, 불판에 20개의 고기 조각이 있고, 각 고기는 5초 안에 다 익는다고 가정하면 5 조각의 고기는 제대로 구울 수 있지만 그 외 15개는 일부가 타버리는 거다..-_-;;


기존 프로세스에서 3번.. 어느정도 고기가 익으면 잘게 자른다가 문제였다. 한번에 최대 관리 가능한 조각의 갯수가 일정한데 조각조각 내버리면 그 관리해야 할 대상이 내 Capacity 를 넘어버리는 거다..-_-;


그래서 고기 덩어리를 잘게 자르는 과정을 최대한 뒤로 미뤘다. 고기 덩어리가 통째로 다 익고 나면 잘라서 곧장 납품하는 것으로 바꿨다.

그 결과 고기 구울 때 상당히 느긋해졌다. 이전엔 수십개의 조각들을 일일이 뒤집느라 바빴는데.. 이젠 큰 덩어리 몇 조각만 슥슥 뒤집으면 된다.


그리하여 나온 새로운 고기 굽기 프로세스

1. 토치 등을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숯에 불을 붙이고 불꽃이 한번 사그라들면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2. 한쪽 면이 익으면 바로 뒤집는데 고기를 자르진 않고, 전체적으로 다 익을 때까지 계속 주기적으로 뒤집어 주기만 한다.

3. 고기 하나를 샘플로 잘라서 속이 다 익었는지를 파악하고, 대충 다 익어가면 제일 얇은 덩어리부터 자르기 시작한다.


잘게 자르는건 최대한 늦춘다!

그 결과 가족 모두가 만족하는 일정한 퀄리티의 숯불 고기 구이를 지속적으로 납품할 수 있었다.


이제 다음 스텝은 ... 어떻게하면 숯향이 좀 더 잘 배어들고 부드럽고 바삭바삭하고 육즙도 충분히 잘 머금은 고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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